창립 50주년 선언문

✪ 가톨릭 농민회 창립 50주년 선언문

- 오직 생명공동체의 길을 확인하며 -

1. 창립 50년의 현장
 2016년 여름은 유사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 역사상 최고, 최장의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되었고 웬만한 채소농사는 거의 망가졌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쌀값은 사상 최대로 내려갔다. 지구 온난화, 기후변화는 바로 오늘과 내일 ‘우리 모두의 삶’을 좌우하는 무서운 현실이 되고 있다.

 1966년 창립한 가톨릭농민회(가농)가 50년을 맞이한 2016년. 우리는 수많은 농민, 교우, 시민들과 함께 서울대병원 농성장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전국 곳곳의 성당과 거리에서 열한 달이 넘도록 항의하고 요구하고 기도하였다. 농민과 서민대중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서울 광화문 광장의 집회, 행진에 나섰다가 무도하고 무능한 박근혜정부의 국가폭력에 쓰러진 백남기 형제를 살려내고,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논, 밭을 뒤로하고 거리에 나섰다.

 그 외침이 밑불이 되고 연인원 1,700만명이 참여한 촛불시민혁명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 구속하였다. 깨어 일어난 시민들은 켜켜이 쌓인 과거의 잘못을 청소하면서, 국민이 주인 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떨쳐 일어났다. 우리 가농은 30년 전 6월 민주항쟁의 주역이라는 자랑스러운 기억을 일깨우면서, 다시는 퇴행과 반동의 역사가 되풀이 될 수 없게 하고 국민주권이 충만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수많은 정의, 양심, 생명, 평화, 민주시민 세력과 함께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다.

2. 가농 50년을 되돌아보며 
 지난 50년 동안(1966-2016년) 한국의 농업, 농촌, 농민은 그야말로 ‘격렬한 축소지향 ’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격변의 반세기를 겪었다. 가농은 지난 50년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농민 스스로, 함께, 깨어 일어나 ‘해방과 통일’‘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꾸준히 일 해왔다. 50년 역사의 전반기에는 농민의 인간됨을 억압하는 온갖 구조악(세상의 죄)과 대결 극복하는데 힘썼다. 후반기에는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함께 그 뿌리인 반(反)생명, 반(反)공동체적인 거대문명과 물신주의를 극복하는 생명공동체 건설운동에 주력하였다.

 우리 가농은 농민 스스로의 각성과 협동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농지 소작실태(1974년) 쌀 생산비조사(1975년) 사업을 실시하였다. 우리는 유신독재의 집요한 탄압 아래서도 함평 고구마 사건(1977년)을 민중의 승리로 이끌었다. 이른바 오원춘 납치사건(안동교구 농민회사건)과 박정희 대통령의 ‘가톨릭농민회와 도시산업선교회의 용공성 조사’라는 특별지시에도 위축되지 않고, 의연하고도 조직적으로 저항하여 유신독재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또한 신군부독재의 삼엄한 폭압통치 아래서도 전국 최초의 부당 조세에 대한 항의 대중집회(1982년), 남북농민교류 제안(1984년)과 거대자본의 개방 압력에 대항한 해방 후 최초, 최대의 소몰이 시위(1985년) 미국 농축산물 수입반대운동(1986년)의 최선봉에서 농민의 권익과 민족의 자존을 위해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 가농은 전체 민주, 민중역량을 결집하고 강화하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년간에 걸친 전국단위 동시다발 대중투쟁의 경험과 역량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을 가져오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고 6월 민주항쟁이후 2~3년 동안 작은 가농, 새 가농 운동으로의 전환이라는 조직적 노력을 기울인 뒤, 우리 가농은 생명공동체 운동이라는 문명사적 대전환 운동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하느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우리농업 농촌을 지키고 살리는 대안운동으로 생명농업을 실천하며 우리밀살리기운동, 우리콩살리기운동, 귀농운동,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농산물이 전면개방 되고 기상이변과 환경생태계 파괴, 식량자급률 하락으로 인한 식량위기, 초국적 자본의 식량독점화 상황에 우리 가농은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자연의 순환원리에 맞추어 인간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함께 공생하고 미래 세대에도 지속가능한 농업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고 험하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우리 가농의 생각과 행동 지침인 ‘개인변화와 사회변화의 동시수행’에 미흡하였다. 농촌사회의 민주화와 공동체적인 삶의 실천을 조화롭게 수행하지 못 하였다. 이제 우리는 지난 50년 가농의 성과와 문제점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성찰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하고 창조하는 보람찬 길을 가고자 한다. 

3. 반백년을 내다보며
하늘이 죽어간다.
땅이 죽어간다. 
물이 죽어간다.
만년 얼음이 녹아내린다.
드넓은 바다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온갖 풀과 나무, 벌레가 죽어간다.
온갖 동물과 미생물이 죽어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은 생명이, 뭇 생명이 죽어간다.
사람이 죽어간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먼저 죽어간다.

 이렇게 밤낮없이 불(화석연료)을 때고도 지구가 멀쩡하기를 바라는가? 거대 자본이 이렇게 많은 물건을 만들고 쓰고 버려도 인간 세상에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가?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유전자조작식품(GMO)과 각종 유해식품이 우리 밥상을 위협하고 있는데 우리의 생명은 과연 안전하겠는가? 죽음과 죽임의 문명, 그리고 독점과 차단의 사회구조 악순환은 지구고열과 사회고열의 합병증폭으로 모든 생명과 인류를 절멸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위기는 홀로 오지 않는다. 인간 정체성의 위기, 사회해체의 위기, 지구생명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 전쟁의 위기에 우리겨레와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 가톨릭농민회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무릇 사회운동이란, 그 시대의 가장 근본적이고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사회적 실천행위다. 우리가 갈 길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생명공동체의 길’뿐이다. 그것만이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며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살리고 땅을 살리고 농업을 살리고 뭇 생명을 살린다. 나부터 실천하고 이웃과 함께하며 농촌공동체와 도시공동체가 함께 ‘생명운동’을 생활화해야 한다.

첫째. 생각을 바꾸자
생명의 세계관, 생명중심 가치관을 깊고 진실 되게 이해하고 실천하자.

둘째. 생활을 바꾸자
모든 물자를 절약하고 모든 물건을 공경하자,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 나를 행복으로 인도한다.

셋째. 세상을 바꾸자
독점과 차단의 사회구조를 공존과 순환의 세상으로 바꾸자

넷째. 문명을 바꾸자
거대 소비 문명을 적정과 활용의 문명으로 바꾸자

우리는 뭇 생명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농부이신 하느님과 함께 대전환의 길을 갈 것이다.

2017. 5. 15
가톨릭농민회 창립 50주년 기념대회 참가자 일동